엄마, 나 그냥 안 가면 안 될까?

출국 전 생각보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아 퇴사일을 앞당기고, 자취방 짐을 빼 본가에 왔다. 이제 우리 집에서 가장 큰 캐리어 하나, 기내용 캐리어 하나에 6개월 동안 나와 함께 할 짐들을 챙겨야 한다.

아…

부지런한 교환학생 선배님들의 게시글을 통해 내게 필요한 짐 리스트도 정리해두었건만, 도무지 짐을 싸기 시작할 엄두가 안 난다. 각종 생활용품부터 옷가지, 전자기기, 종이서류까지 - 모아보니 챙겨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. 만하임에 가기 전, 공항 근처 호텔에서 1박을 하기로 해서 그날 필요한 물건들은 또 따로 분류해 작은 캐리어에 챙겨야 한다.

풀지도 않은 자취방 이사 박스들이 방구석에 쌓여 있고, 내 방은 전쟁터다. 그리고 내 머릿속은 더하다. 함께 출국하는 친구들과의 단톡방이 울린다. 나만 아직도 짐을 싸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보다.

허튼 생각은 그만하고 움직여야 하는데 도무지 움직이고 싶지가 않다. 막상 떠나려니 무서운 거다. 코로나 시국에 무사히 입국할 수 있을까, 챙긴다고 챙겼는데 빼먹은 서류가 있는 건 아닐까, 독일어 하나도 모르는데 소통할 수는 있을까, 필요한 짐이 캐리어에 다 안 들어가면 어떡하지, 항공사에서 캐리어를 잃어버리면 어쩌지. 무엇보다도 내가 외국에서 잘 살 수 있을까? 아무리 이 집구석과 학교가 지겹다지만, 괜히 집 나가서 개고생하는 건 아닐까. 해외에서 코로나 걸리고 운 나쁘게 크게 아프면 어떡하지. 개고생은 이미 시작된 것만 같았다. 아, 나란 사람은 정말. 그냥 남들처럼 얌전히 한국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결혼하면 편할 텐데, 그걸로는 절대 만족하지 못하니 나로 살기는 참 피곤하다.

하…

땅이 꺼지게 한숨을 뱉곤 진지하게 엄마에게 묻는다.

“엄마, 나 그냥 안 가면 안 될까?”

웃기다. 엄마가 가라고 한 적도 없는데. 이 시국에 곧 죽어도 가야겠다고 고집부린 게 누군데. 진심으로 묻는다. 엄마가 가지 말라고 해도 결국엔 갈 거면서. 나는 늘 이런 식이다. 가야 하는 게 나다운 결정이라는 걸 알면서도, 막상 정말로 그때가 오면 옴짝달싹도 못하고 도망치고 싶은 사람.

엄마 역시 저 질문이 정말 엄마를 향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. 당신도 6개월의 이별이 걱정되고 아쉽지마는, 당장 출국 전날 밤인 지금 엄마에게 허튼 감상에 빠질 시간은 없다. 깔끔한 성격의 그녀는 얼른 내 짐을 챙겨 가방을 봉인하고, 전쟁의 흔적처럼 남겨진 짐덩이들을 박스에 봉인해 안 보이는 곳에 넣어둘 생각뿐이다.

슬라임처럼 소파 위에 흐느적 누워 징징대던 나는, 엄마의 철저히 계획된 무관심에 머쓱해하며 다시 짐 싸기에 합류한다. 이 과정을 두세 번 반복하면 드디어 짐 챙기기 끝이다. 수하물 무게까지 겨우 맞췄다. 끝없이 줄이고, 버리고, 비우는 과정이었다. 휴, 이걸 해내네. 교환학생 선배들은 모두 이 고된 과정을 거쳤던 건가.

그들을 한없이 존경하며 겨우 눈 붙이는, 짧은 밤이었다.